소속 | 울산소방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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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 소방서장 |
순직일 | 1948. 9. 10 (금) |
성명 | 서달식 서장 |
울산소방서 서달식 서장 (徐達植)
[1892~1948. 9. 10]
서달식서장은 1892년 울산에서 태어났다. 울산에서 태어나 울산에서 성장하였고 울산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쳤고 울산에서 많은 활동을 통해 애국의 모범을 보였다.
1920년 28살의 나이에 울산 청년회 (민중계몽, 풍속교정, 지역사회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에서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과 1939년에는 울산읍 협의회에 선출되었고 1938년에는 울산 산업조합의 평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광복 직후에는 치안대 역할을 했던 울산의용소방대에서 보안대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통해소방임무를 수행했으며 울산건국청년단과 함께 치안활동을 병행하였다.
해방후 1945년 12월 23일 보안대가 울산소방단으로 재편되자 초대 단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당시 울산지역의 우익정치단체로 만들어진 울산건국협력회의 부위원장, 울산여자고등학교 설립의 주체가 된 기성회의 부회장, 독립촉성 국민회 소속으로 울산지부장과 건국협회의 부회장 역할도 맡아 다방면으로 활동하였다.
울산소방은 1911년 10월 일본인들의 재산을 보호할 목적으로 설립되어 1937년 비어있던 울산역 부지에 지역유지들의 원조를 얻어 공사비 5천여원으로 울산소방회관을 건축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해방 후 울산소방회관은 개보수되어 울산소방서 청사로 사용되어 왔으며 일제강점기에 쓰던 낡은 장비를 인수하여 23명의 소방원으로 소방활동을 하고 있었고 서달식이 초대서장을 맡았던 것이다.
(1967년 지금의 건물이 신축되었고 1997년부터는 울산 중부소방서, 2014년부터는 성남 119 안전센터가 자리잡고 있다.)
해방 후 정치적으로 좌 우익이 심하게 대립하던 상황이었고 서로 뜻이 맞지 않으면 테러가 일상화되고 있는 혼돈과 무질서의 상황 이었다.
울산의용소방대 안에서 보안대를 조직하여 치안활동과 소방활동에 뛰어든 서달식은 자연스럽게 소방서장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주민들의 대변자를 자처하고 일인 관료들과도 담판을 지어 성사시킨 일이 많았던 서달식은 품위를 유지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한결같이 훈훈한 인정과 인성을 잃지 않아 지역민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좌익들의 선동과 무장폭력 앞에서 고분고분 하지 않고 저항하며 특히나 사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며 모습에 반탁운동에 앞자서고 동생도 경찰관으로 근무하고 있기에 위험인물로 간주되었는지 좌익들의 암살대상이 되었다.
1948년 9월 10일 아침 울산 중구 복산동에서 출근을 위해 자택을 나서다가 울산 신불산 지역에 거점을 두고 빨치산 활동을 하던 무장 유격대원이 쏜 권총탄에 순직하고 말았다.
서달식 서장은 울산 소방 최초의 순직자로 기록되어 있으며 1955년 울신지역 유지들이 중구 북정동에 있던 울산경찰서 앞에 충혼탑을 세웠으며 서달식의 이름도 새겼다. 충혼탑은 2001년 8월 15일 개축되었으며 서달식 서장의 유해는 울산의 선영에 안장되어 계시다가 1988년 부산시 기장군 정관읍 두명리 백운공원묘원으로 이장되셨다.
가족들에 의해 세워진 묘비에는 순국열사 달성서공 달식지묘 (殉國烈士 達城徐公 達植之墓)라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해 제주에서는 4.3사건이 일어났고 같은 이유로 여수에서는 여순 사건이 발생했다.
출처 : 네이버 향토문화 전자대전, 울산신문 기사,. 경상일보 기사
메인의 추모비는 울산성 입구, 울산 경우회에서 세운 순직경찰 충혼비에는 서달식 민선소방서장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사진은 점점 커지는 울산의 규모에 의해 자리를 내어주고 1988년 부산 백운산공원묘지로 이장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