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정신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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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포항소방서 손진명 소방원

소속 경북 포항소방서
계급 소방원
순직일 1950. 8. 10 (목)
성명 손진명 소방원


6·25 전쟁 중 전사 손진명 소방관

 

소속 : 포항소방서

계급 : 소방원

성명 : 손진명 27세


1923.11.8.일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출생~1950.8.10 포항시 북구 득량동에서 전사

 

손진명 소방원은 일제강점기 1923년에 경북 경주시 양동리 태어났다. 양동 마을은 6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유명한 양반 마을로 경주손씨와 여강이씨의 집성촌이다. 손 소방원은 이곳의 경주손씨 후손이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모시는 어려운 살림을 이어가던 중 생계가 어려워 일자리를 찾아 전 가족이 포항으로 이주하였다. 청년이 되었을 무렵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홀어머니를 두고 일본군에 징집되어 3년 동안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꿈과 같은 해방을 맞아 포항으로 돌아와 해방된 조국의 국군에 입대하려 했으나 그의 어머니가 강력하게 만류하며 그의 결혼을 서둘렀다.

 

수줍어 고개도 들지 못하는 영일 출신의 김경선(19)을 중매로 만나 서둘러 결혼했다. 그리고 포항 경북여객의 운전사로 취업했다. 당시의 경북여객은 일본인이 귀국하면서 두고 간 버스 3대와 택시 2대를 모아 운행하는 작은 운송회사로 차량의 고장이 잦아 운전사는 매일 매일 수리해야만 운행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그는 이 일을 성실하게 해내어 주위의 인정을 받았다.

 

이때 포항소방서에 근무하는 친구의 권유로 소방원으로 들어가 불 잘 끄기로 유명한 소방수가 되었다. 여기서도 그의 기술과 성실함이 인정되어 곧 기관부 책임자가 되었다. 당시의 포항소방서는 급수차를 포함하여 소방차는 4대뿐이었다. 그것도 수시로 고장이 나서 손 소방원의 손길에 닿아야 시동이 걸릴 정도의 낡은 차량뿐이어서 퇴근 후에도 수시로 불려 나가 차량을 수리해야만 했다

 

19506.25 전쟁이 터졌다. 그해 8월 북한군 12사단이 동남진하여 포항이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포항 시내에 북한군이 쏜 대포가 떨어지고 밤새 총소리와 피난민들의 아우성으로 혼란이 극에 달했다.

 

810. 며칠 전부터 전 소방원은 전시 지원을 위해 소방서에 대기 중이었다. 손 소방원은 태어난지 100일밖에 안 되는 둘째 아들이 눈앞에 아롱거렸으나 잠시라도 집에 들릴 겨를이 없었다.

 

이날 새벽 해군 포항기지 사령부에서 긴급히 출동하는 군함에 급수 지원요청이 들어왔다. 손 소방원은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무사히 임무를 마칠 만한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아직 미혼인 조수 소방원이 따라나섰다. 평소에는 둘이 짝을 맞추어 소방차 운행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그는 조수의 동행을 거절했다.

 

지금은 전시라 너무 위험하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나 혼자 다녀오겠다. 너는 남아서 소방서를 잘 지켜라.”라고 당부하고 급수차의 시동을 걸어 출발했다. 이때가 새벽 4시였다.

 

당시 소방차의 급수탑은 현재의 포항의료원인 도립병원 앞에 있었다. 소방차를 세우고 물을 받던 중 요란한 총소리가 들렸고 인근에서 도망치는 사람들, 피난을 유도하는 사람들로 인해 위급상황이 감지되었다. 그러나 손 소방원은 급수 작업을 중단하거나 소방차를 버리고 피신할 수는 없었다. 이 급수차는 포항소방서에 몇 안 되는 소중한 자산이고 전쟁의 참화 속에서는 소중하게 쓰일 장비이기 때문에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떡하든 이 차로 무사히 해군 함정에 급수 지원을 완료하고 소방서로 복귀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도로는 피난 시민들로 가득 찬 상황이라 물을 실은 소방차가 득량동까지 왔을 때는 인파에 묻혀 더 움직일 수 없어 운전대를 잡고 발을 동동 구르던 그때 기습적으로 달려든 인민군들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군복과 비슷한 당시의 소방복을 입은 그를 한차례 심문하고 그가 군인이 아님을 알면서도 27살의 젊은 소방관을 길옆 콩밭으로 끌고 가 즉결처분했다. 이때 학살 현장을 목격한 마을 이장이 시신을 거두어 콩밭 가에 묻었다.

 

한편 날이 밝자 손 소방원의 집에서도 요란한 총소리에 불안함을 느낀 아내 김경선은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하고 있을 때 소방서 직원이 달려와 위험하니 속히 피난하라고 전해 주었다. 그러나 손 소방원의 어머니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들을 두고 갈 수 없다고 버텼다. 조금 후에는 후퇴하는 군인들이 와서 인민군이 코앞에 왔으니 어서 피난하라고 고함을 지르자 할 수 없이 시어머니와 두 아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나섰다.

 

며칠이 지나 피난지에서 만난 지인으로부터 남편의 소식을 전해 듣고 한차례 실신하기도 했다. 피난길에 만난 소방서장이 모금한 돈을 얼마 간을 전해 주고 갔다. 남편의 친구들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위로금을 보탰다. 이 돈을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고 모아 두 아들을 키우고 시어머니를 모셨다.

 

당시 전쟁이 가져다준 참상은 마냥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수줍음을 타던 새댁은 살기 위하여 막노동과 장사를 하면서 억척스러운 여인으로 변해갔다.

 

전쟁이 끝난 후 1961년 손진명 소방원의 공로가 인정되어 국가유공자 예우를 받게 되었다. 유해는 가매장되었던 득량동 콩밭에서 인근 경주최씨 선산의 비탈진 곳으로 이장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이 지역이 택지개발계획지구로 지정되었고, 가난으로 미처 묘지를 구하지 못해 유골을 화장한 후 포항 앞 바다에 뿌렸다.

 

올해 88일 이흥교 소방청장은 국립대전현충원에서 95세의 김경선 여사를 만났다. 소방청은 잊힌 선배 소방관 묘역 찾기 사업을 진행하던 중 6.25 전쟁 때 전사하고도 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한 소방관 중 손 소방관을 찾아 그 위패를 봉안하게 되어 실로 75년 만에 현충원에 잠들게 된 것이다. 이 자리에는 손 소방관의 후손 15명도 함께 참석했다.

 

김경선 여사는 행사가 끝난 후 ()순직소방공무원추모기념회 김종태 사무총장을 만나 그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돌이켜 보면 나만큼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산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나이 들고 힘들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되었지만, 결혼 후 44개월을 같이 산 소방관 남편의 이름과 얼굴 생김은 또렷이 기억나며 세상에서 그렇게 멋진 사람은 없었습니다.”

 

95세의 노인은 지난날을 회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신다. 72년 전 둘째를 낳고 좋아서 빙그레 웃던 남편을 추억하며 과거 속으로 달려가는 듯 보였다.

 

지난 9월 소방청은 순직 소방공무원 520인을 기린 추모백서 기억을 위한 기록을 발간했다. 이 책에는 역사 속에 잊혀가는 한국전쟁 전사 소방관과 일제강점기 소방관의 이야기도 담겨있다. 손진명 소방원의 이야기도 있다.

 

이흥교 소방청장은 소방 역사 최초로 순직 소방공무원 추모백서발간을 뜻깊게 생각한다.”오늘 이 시간에도 오로지 국민의 안전만을 생각하며 헌신의 땀과 열정을 쏟아내고 있을 모든 소방 가족에게 또 하나의 자부심이 되고 유가족분들의 상처가 조금이나마 치유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추가

손 소방원이 유해는 인민군이 물러 간 후 콩밭에서 유해를 확인하여 인근의 득량동 경주최씨 선산의 비탈진 곳에 모셨다고 합니다. 그것도 늘 경주최씨 집안의 눈치가 보였는데 20여년이 지나 주택부지 개발을 위하여 영일군청에서 이장하라고 하는 통에 가난한 살림에 남편을 모실 비용도 없어서 공무원들이 사정을 듣고 나와서 화장 후 바다에 뿌렸다고 합니다.

 

손진명은 1961년 공로가 인정되어 국가유공자 예우를 받게 되었으며 2022.8.8. 소방청에 의해 국립대전현충원에 위패가 봉안 되었습니다.

 

지난 2022925일 순직소방공무원 유가족회에서 김경손 할머니 댁을 방문하여 위 내용을 구술한 것을 청취하고 정리하였으며 고인에 대한 자료는 소방서에도 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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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8일 위패로 봉안된 손진명 소방원

국립대전현충원 현충탑 뒤 위패봉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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